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은 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외가에서 승문원 판교를 지낸 부친 언형과 모친 인천 이씨의 3남 2년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건중, 남명은 호이다.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으나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자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면서 학문을 배우고,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을 목격했다. 19세기때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죽음을 당하고 숙부도 이에 연루되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잘못된 정치의 폐단을 슬퍼하였다.
30세 때부터 처가가 있는 김해의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48세에는 다시 고향의 삼가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길렀다. 55세에는 그 유명한 단성소(丹城疏)를 올려 사림의 기개를 드높혔다.
61세에 지리산 아래 산청 덕산으로 옮겨 산천재를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다.선생이 67세 되던 해 왕위에 오른 선조 임금이 여러번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아니하였고, 68세에는 학문적 성과를 집약한 것으로 유명한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정치의 폐단과 이를 개혁할 대안을 제시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경과 의 두가지로 집약되는데, 이는 주역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경은 내적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있게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에서 따온 것이다.
일생동안 선비의 삶과 국정의 쇄신,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다가 72세인 1572년 2월 28일 산천재에서 운명하였다.
단성IC에서 지리산 중산리 가는 길목에 있다.
남명기념관 정문. 도로 맞은편에는 산천재
남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지만, 읽어보고 관람하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됨
남명 동상
신도비
신도비문을 한글로 번역한 비
남명기념관
남명선생의 철학을 도식화
마루 벽 위의 벽화(정면, 좌, 우 3개의 벽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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