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은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남서쪽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다.서로는 황강 물길을 따라 합천에 이르고, 남강 물길을 따라 진주로 연결된다. 북으로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현풍~왜관, 남으로는 삼랑진~부산으로 연결된다. 수운의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지인 것이다. 북한군의 6·25 불법 남침으로 서울을 잃고 경부축선을 따라 지연작전을 전개하던 아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 곳은 낙동강전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낙동강전선은 대한민국 사수의 최후의 마지노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여기가 뚫리면 대구와 부산 함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6·25전쟁 중 낙동강전선에서 피아간의 전투가 치열했던 것이다. 혈전이 벌어졌던 곳은 대구 북쪽 다부동과 북서쪽 왜관, 그리고 서남쪽 창녕과 마산지역이었다.북한군은 8·15 광복절을 부산에서 맞이하기 위해 그야말로 모든 전력을 낙동강전선에 쏟아 부었다.
왜관을 비롯한 낙동강전선의 주요 거점에서 8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동시 다발적으로 피아간 혈투가 벌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낙동강 남서쪽의 거점은 창녕이었고, 여기는 미 제24사단이 맡고 있었다. 24사단은 6·25전쟁에 가장 먼저 참전한 미 지상군으로 7월 중순 대전전투를 치른 부대였다. 하지만 대전전투에서 서울 점령에 앞장 섰던 북한군 최정예의 3사단과 4사단의 협공으로 대패했다.
바로 이 부대가 대구 서쪽 현풍에서 창녕 남쪽 남지에 이르는 낙동강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여기를 침공한 적군은 대전에서 남하한 북한군 제4사단이었다. 일전을 겨루었던 피아의 부대가 창녕지역에서 다시 맞붙게 된 것이다.8월 6일 오전 적군은 박진나루를 건너 영산을 향해 쳐들어 왔다. 의령과 창녕을 잇는 낙동강 건널목인 박진나루를 건너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개인 전투장비는 머리에 이고, 부대 전투장비는 뗏목을 만들어 운반하면서 침공했다.
대전전투 패퇴로 전력이 크게 손상돼 있던 미 제24사단은 초기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미 제2사단과 해병 제1사단의 지원으로 점차 전세를 뒤집었다. 그리고 8월 17·18일 양일 간에 걸친 반격작전으로 적군을 크게 무찔러 낙동강전선 외곽으로 몰아냈다. 결국 북한군 제4사단의 침공을 격퇴함은 물론 재기 불능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로써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더 나아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다.창녕 박진지구전적비와 전쟁기념관은 창녕군 남지읍 월하리에 위치해 있다. 그날의 격전장인 박진나루터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 전적비가 서 있고, 산 밑 초등학교 부지에 건립된 전쟁기념관은 군 단위 시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다. 6·25전쟁의 산 교육장으로 아이들과 함께 보고 느끼고 기억하기에 손색이 없다.(자료: 국가보훈처.김용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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