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흥인지문을 시작으로 남쪽으로 이간수문과 남동쪽의 광희문을 거치는 구간이다. 숭례문구간과 마찬가지로 평지구간으로 도시화로 인해 성벽이 훼손 또는 멸실되었다.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의 이간수문은 동대문운동장 철거후 발굴조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광희문구간에서 장충체육관구간은 주거지역이므로 조용히 탐방하여야 한다.
탐방코스: 흥인지문-오간수문터(오간수교)-동대문역사관-이간수문-광희문-광희문순교자현양관-장충동골목길-장충체육관
탐방일시: 2020.5.13(수)
한양도성박물관쪽에서 바라본 흥인지문
<사적 제461호(오간수문 터)>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었다. 이 부근은 서울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서 내사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이곳을 거쳐 도성 밖으로 흘러나갔다. 성벽이 청계천을 만나는 위치에는 수문들이 이어져 있었다. 동대문운동장 관중석 밑에 매몰되어 있다가 발굴된 이간수문은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오간수문은 추정 재현되어 있다. 다만 오간수문이 있던 자리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조성된 공원이다. 조선 후기 이곳에는 훈련도감의 별영인 하도감과 화약 제조 관서인 염초청이 있었다. 1925년 일제는 일본 왕세자 결혼 기념으로 이곳에 경성운동장을 지었는데, 성벽을 이용하여 관중석을 만들었다. 경성운동장은 해방 후 서울운동장으로 개칭되었다가 ‘88올림픽(제24회 서울올림픽)’ 이후 다시 동대문운동장이 되었다. 근현대 한국 스포츠의 중심지였던 이 운동장이 헐린 것은 2007년이다.
당시 동대문운동장 철거 과정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성벽의 일부와 이간수문(남산에서 발원한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두 칸짜리 수문), 치성(雉城 ·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물), 하도감으로 추정되는 건물 유구 등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이간수문은 원 자리에 있으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에 있던 건물 유구는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이 자리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동대문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한양도성내 중부에 위치한 좌.우 포도청, 형조전옥, 의금부옥 등에서 병사, 장살 또는 교수형으로 순교한 천주교신자들은 그 가족 친지들이 즉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할 경우, 하급 관리들에 의해 광희문 밖으로 운반되어 버려졌다. 광희문밖은 박해시기에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한 수많은 순교자들과 그들 가운데 790위의 순교자 시신이 버려지고 묻힌 곳이다.
이처럼 광희문성지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들 790위의 시신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성지이다.
광희문 순교자현양관 내부에서 바라본 광희문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이다.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 광희문 바깥의 마을, 신당동의 유래 :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이다. 일반 백성들도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이용한 왕이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가 예상보다 빨리 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문 밖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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