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도에는 봉두산이라 표기돼 있지만, 이 산 안에 깃든 태안사 일주문 현액에는 桐裏山(동리산) 泰安寺(태안사) 라 되어 있다. 산이름이 언제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두 이름에 연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봉황이 서식하는 나무가 오동나무이고 태안사가 자리잡은 곳을 둘러싼 주변 산세가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해서 동리산이라 불렀으며 둘러싼 주변 산세의 최고점을 봉황의 머리 즉 봉두산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봉두산 주변에는 곡성 특유의 내륙산지를 이루고 있어 정상에 올라서면 순천쪽 황학리의 작은 들판을 제외하고 주변 조망이 온통 산뿐이다. 남서쪽으로 삼산과 희야산 능선 넘어로 모후산이 오똑하고 북서쪽으로는 통명산 넘어 무등산까지 시야가 트인다. 동쪽으로는 둥주리봉과 자라봉, 그리고 지리산이 장막을 치고 있다.
이러한 내륙산지 조망이 산행의 맛으로는 제일이지만 봉두산은 태안사 여행에 초점을 맞추어도 좋을 산이다. 곡성~구례 간 17번 국도 상 압록(보성강이 섬진강에 합류하는 곳)에서 18번 국도쪽(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마치 히말라야의 한 거대한 협곡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들고 약 4km정도 강변 도로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들면 태안사로 드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약 5km 가면 태안사 입구에 닿는데, 강변을 따라 난 도로에 차량통행도 뜸해 드라이브코스로도 일품이다.
장승 한 쌍과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는 입구서부터 다시 협곡을 비집고 낸 비포장길을 따라 들어서면 자유교 넘어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여기에 차를 놓고 정심교, 반야교, 해탈교를 건너 능파각에 이르는 길은 호젓하기 그지없고, 봄이면 벚꽃이 터널을 이룬다. 능파각은 계곡에 걸쳐 지은 고색창연한 다리겸 정자다. 경찰충혼탑이 나오면 태안사는 바로 그 위 넓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자료: 곡성군청 문화관광)
산행일시: 2010년 7월 10일(토) 흐리고 구름 많음(장마철이라서 시계가 좋지 못함)
산행코스: 태안사입구-능파각-경찰충혼탑-일주문-부도밭-화장실-다리건너(들머리)-성기암-외사리재-묘지-봉두산정상-
절재-태안사
태안사입구 능파각 바로 아래 주차를 해도 되고 능파각 위 경찰충혼탑을 지나 일주문 옆 연못아래 주차공간이 많음. 조태일시문학관 앞 공용주차장에서 능파각까지 약 2km정도의 비포장길이 이어진다. (태안사를 중심으로 원점회귀 가능)
능파각: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건물이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라 이름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한다
능파각은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 광자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년(1767)에 다시 지었다. 다리를 건너는 쪽에서 보았을 때 앞면 1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이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태안사 연못
태안사 3층석탑은 몇 년 전 만해도 지금의 부도밭인 광자대사 부도 앞에 있었으며, 당시에도 기단부 면석 1매와 1층 옥개석, 2~3층의 탑신이 유실된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연못을 만들면서 연못 중앙의 섬으로 옮겨 유실된 탑재들을 새로 만들어서 완전한 모양으로 복원하였다.
이 석탑은 비록 옛 부재에다 일부 탑재를 새로 만들어 복원한 것이기는 하나 탑의 조형미에 있어서는 아직까지도 통일신라시대의 균형감을 그대로 갖춘 고려 초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170호로 지정되었다. 부도밭에 상대갑 석재가 한 벌 더 있어 쌍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층석탑이 자리한 원래의 위치도 알 수 없다. 다만 금강선원 앞의 축대 위에 놓인 옥개석재로 미루어 그 부근일 가능성만 추측할 따름이다.
태안사 입구에 있는 일주문(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으로, 능파각에서 약 200m쯤 지나 높직한 돌계단에 올라서 있다. 조선 숙종 9년(1683)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하였다.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앞면 1칸의 규모로 세웠으며,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웠다.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앞·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찬 느낌이 들며, 매우 화려하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앞면에는 동리산 태안사 (桐裏山泰安寺) 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태안사부도밭: 광자대사비와 탑비
성기암
성기암을 둘러보고 본격적인 산행시작
들머리부터 날머리까지 119안내표지판이 1번부터 15번까지 표시되어 있음
전형적인 육산으로 걷기좋은 산행길이다
첫번째로 전망이 트이는 곳이건만 흐리고 구름이 산을 가리고 있기때문에 시계가 흐리다. 우측에 태안사가 흐릿하게 보이고 태안사 좌측 외사리재로 올라서 걸어온 능선이 보인다
태안사를 줌으로...
봉두산정상
성기암입구의 1-1표지판에서 날머리 1-15까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태안사에서 좌측 혹은 우측으로 원점회귀 가능)
태안사(泰安寺)는 통일신라 경덕왕 시절인 772년 법명이 알려지지 않은 신승(神僧) 셋이서 절터를 잡고 대안사(大安寺)라 하면서 개산한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태안사가 한국 불가를 크게 선양한 계기는 서당지장(西堂地藏)으로부터 법을 전수받은 혜철선사가 847년(문성왕 9년)이 절에 주석하면서 동리산문을 연 때부터였다.
혜철선사는 당나라 지장선사의 문하에서 26년을 보낸 후 지장이 입적하자 신라로 돌아와 이 절에 주석하면서 절 이름도 태안사로 바꾸고 마조도일-서당지장을 잇는 선문을 편다. 왕건이 태어날 징후를 1년 전에 알리고 고려 왕손에게 훈요십조를 귀감으로 삼게 한 도선국사가 바로 혜철의 상수제자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 이 탑은 승려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탑으로,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태안사는 신라시대 선(禪)을 가르치는 유명한 종파인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높으며, 적인선사 혜철(惠哲)은 태안사가 속한 동리산파를 연 스님이다.
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부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3단의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아래 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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