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람/기타지역

경복궁-우정총국(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조계사

그리운 바람길 2017. 9. 23. 20:45

 

 경복궁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 권역에 집현전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 안에 남아있던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있다.(자료: 문화재청)

 

 

방문일시: 2017.9.16(토)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품계석은 근정전에서 행사를 할 때 신하들이 자신의 지위에 맞게 줄을 설 수 있도록 표시한 돌을 말한다. 품계석은 근정전을 바라보면서 오른쪽(동쪽)에 있는 품계석에는 문신들이 차례로 줄을 서고 왼쪽(서쪽)에는 무신들이 품계석에 따라 줄을 서게 된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근정(勤政)이란 이름에는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경복궁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과거 및 외국사절의 접견 등 국가의 공식행사를 치르던 곳이다.오늘날의 근정전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고종 4년91867)에 중건한 것이다.

 

 

 

 

 

 

사정전은 왕의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최고통치자인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신하가 매일 왕을 배알하던 약식 조회인 상참(常參)을 비롯하여 경연(經筵), 윤대(輪對) 등 일상적인 국정운영이 이루어졌다. 현재의 사정전은 고종 4년(1867)에 중건한 것이다

 

 

 

 

강녕전은 왕의 일상생활 공간인 침전으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신료들과 편안히 만나 국정현안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이곳에서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 하였다. 세종 22년(1440)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고종 2년(1865)에 중건되었다. 현재의 교태전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아미산은 교태전의 후원으로, 화단을 계단식으로 쌓아 만든 화계(花階)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봉황,소나무,매화,국화,불로초,바위,새, 사슴 등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그밖에 과거시험,기우제등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태종 12년(1412) 연못을 새로 만들고 누각도 크게 지었다. 지금의 경회루는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고종 4년(1867)에 중건한 것이다.

 

 

 

 

 

 

수정전은 고종 4년(1867)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의 궐내각사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다. 세종때에는 한글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이곳에 있었다. 궐내각사는 수정전 앞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일본에 의해 대부분 철거되었다.

 

 

 

 

 우정총국은 당시 해외를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의 건의로 근대식 우편 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고종 21년(1884)에 설치한 관청이었다. 이곳은 우정총국 건물이 완공되어 축하 연회를 여는 것을 기회로 삼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개화파들은 집권 사대당을 제거하고 신정부를 조직하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더 유명하다. 그런데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남에 따라 이 관청은 문을 닫고 우정총국에서 찍은 5종류의 우표는 사용되지 못하였다.

 

 

 

우정총국 건물은 일제 때 일본인이 거주하고, 광복 후에도 개인주택으로 사용하면서 여러 건물이 모두 헐리고 1채만 남아 있었는데 정보통신부에서 이 건물을 구입한 후 체신기념관으로 꾸미고 우편관계 자료를 전시하여 일반에게 공개 하고 있다.

 

.

 

 

 

 

 

 

 

 

 

 

 

 

 

 

 

 

 

 

 

 

 

 

 

 

 

 

 

 

'길바람 > 기타지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선도 일출(2019.1.1)  (0) 2019.01.01
원주 성황림(가을 성황제)  (0) 2017.10.29
석파정(서울미술관)  (0) 2017.09.22
백사실계곡(백석동천)  (0) 2017.09.22
광릉(경기도 남양주시)  (0) 2017.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