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으뜸 사찰입니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절은 신라 화엄종의 도량(道場)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安養』은 곧 『極樂』을 일컬음이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은 격이 되는 것입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3년(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경내에는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255호)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국보 제46호), 고려각판(高麗刻板)(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도유형문화재 제127호), 삼층석탑(三層石塔)(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습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遺物館展示館)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방문일시: 2013. 8. 22(목)
부석사 경내로 올라가는 최하층의 좌측 노변에 위치해 있는데 양 지주가 1m간격으로 동서로 상대해 있다. 전면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고 다만 양쪽 모서리로 모를 약간 죽였다. 전후 양 측면으로는 20cm폭으로 두 줄의 음각선대를 테두리에서 5.4cm 간격을 두고 넣었다.
지주 정상부의 바깥쪽 모서리는 호선을 2단으로 깎아내었고 안쪽에는 간구를 내었는데 장방형이다. 양지주 사이에는 간주를 받는 대석이 남아있는데 사각형의 하대 위에 원형으로 테를 만들고 안으로 지름 30cm의 원공을 두어 당간이 끼워지도록 하였다. 원형의 테 밖으로는 몰딩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간결, 단아해 보이게 비교적 가늘고 긴 편이면서도 아래와 위의 두께에 다소 차이가 있어 안정감을 지녔다. 조성년대는 부석사가 창건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석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배치하였다.
기둥은 배흘림이 많은 두리기둥을 세웠고, 지붕 네 모서리에 활주를 받쳤다. 공포는 헛첨차 없는 주심포양식으로 내외2출목이며, 가구는 전·후퇴 9량집의 팔작지붕이다. 전면은 정(井)자 살창으로 되어 있고, 후면은 중앙칸에 신방을 두어 쌍여닫이 판장문에 그 양쪽에는 붙박이 살창을 달고 내부에 판문을 덧댔다. 상부가구수법은 횡단면으로 보아 외진의 평주와 내진의 고주 사이에 퇴량이 걸려 있다.
고주와 고주 사이에는 대량과 그 위에 종량이 걸쳐 솟을 합장과 대공이 그 위에서 종마루를 받치고 있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고 남향하는 건물의 서편에 불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 장육의 아미타여래상을 동향하여 안치하였으며 그 상부엔 보개를 두었다. 1916년에 있었던 해체 보수때에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7년(1358) 왜화를 당한 것을 고려 우왕 2년(1376)에 중수하였다 하였으나 가구방식이나 세부수법에 장식적인 요소가 적은 점과 주두, 소루 등이 내반된 곡을 가지고 굽받침이 남아 있는점 등 전체적인 건축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무량수전과 자오선상에 있다. 사각의 이중 기대석 위에 8각을 기본으로 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이다. 지대석은 4매석으로 상면에 3단의 기단받침을 각출하였다. 방형의 기단석은 각 측면의 2구씩의 안상을 배치하였고 상면에는 팔각으로 3단의 하대받침을 각출하였다. 하대석은 평면 팔각의 귀꽃을 갖춘 팔엽복변연화문대이다. 간주석은 팔각주이다. 상대석은 팔엽의 단판앙련인데 잎 안에는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사면에 화창을 내었고 창 주변으로 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있다.
다른 사면에는 각 1구씩의 공양미륵상이 배치되었다. 옥개석은 전각이 뚜렷하고 후대 석등들에 비해서는 옥개석의 두께가 얇고 날렵한 편이다. 옥개석의 밑면은 이단의 낮은 받침을 새겼고 절수구가 남아있다. 상면 합각의 우동도 뚜렷하다. 정상부에서는 팔엽의 단판연화문을 돌렸고 그 위에 2단으로 상륜받침을 두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고려시대 소조불상(흙으로 만들었다)이다. 우견편단의 대의에 촉지인을 하고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나발의 머리에 크고 둥근 육계가 올려졌고 상호는 살이 오른 풍만한 인상으로 이목구비의 표현이 뚜렷하다. 목은 긴 편이고 삼도가 일정한 간격을 보인다.
신체 표현도 넓은 하체로 인해 당당하고 어깨도 건장하고 넓다. 우견편단으로 걸친 대의에는 간격이 좁은 평행의습선을 일률적으로 새기고 있다. 불상의 뒤로 독립된 목조광배가 놓여있다.
신광과 두광을 2조선의 원으로 각각 구분하고 화염문을 돌려 주형거신광을 이룬다. 문양은 화염문과 당초문이 넓고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두광에는 3구, 신광은 4구의 화불을 부착시켰던 흔적이 남아 있다. 불단은 동향으로 설치되었고 안으로 폭 237cm, 측면이 200cm, 높이 105cm의 토석을 혼용한 수미단의 원형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신라시대의 녹유전이 있으나 후설된 목조불단으로 인해 가려져있다
사찰의 이름이 유래된 뜬돌. 지금도 불전뒤 바위와 그것을 덮고 있는 큰 바위 사이에 끈을 넣어 보면 넘나드는 것으로 돌이 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애잔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온다
의상대사는 중국에서 불법을 공부할 때 잠시 머물렀던 신도의 집에서 선묘낭자와 만난다. 그후 선묘낭자는 의상대사에게만 온 마음을 바치지만, 출가한 승려를 향한 사랑은 애초부터 속세의 관념대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묘낭자는 귀국길에 오른 의상과 이별하지 않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 의상을 따라 신라로 온다. 그후에도 용이 된 선묘낭자는 그를 보호하고 도와 준다.부석사를 창건할 때도 절터에 이미 자리를 잡은 도적떼를 물리치기 위해 큰 바위를 세차례나 하늘에 띄우는 이적을 행한다. 바로 이 전설을 간직한 뜬돌을'부석'이라고 부른다.
부석사 조사당은 무량수전 뒷산에 있는 건물로 이 절을 지은 의상조사의 진영을 안치하고 있다. 건물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신종 4년(1201)에 단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이 확실하다. 그 후 고려 공민왕때의 병화로 소실된 것을 우왕 3년(1377)에 원응국사가 재건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조선 성종 21년(1572)에 경연한 기록이 있어 이 건물의 변천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건물은 낮은 장대석 기단위에 있는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헛첨자가 있는 주심포계의 건물이다. 창호는 전면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그 좌우에 광창이 있다.
이 불상은 본디 부석사 동쪽 옛절터에 있던 것을 자인당으로 옮겨온 것이다. 두손은 없어지고, 얼굴과 대좌, 광배를 모두 갖춘 형태이다.
이 두 불상은 세부조각만 약간 다를뿐, 전체적인 모습과 조각양식이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띄고 있으며, 부분적인 묘사에서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을 준다. 또, 가슴쪽으로 올라간 두팔로 보아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으로 추정된다. 비로자나불은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불상양식으로 경직된 신체, 형식적으로 묘사된 옷주름, 다양한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와 대좌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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