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람/경남권

밀양 어변당(적룡지)

그리운 바람길 2011. 8. 27. 21:31

 

 어변당(魚變堂)은 조선초기의 장수였던 어변당 박곤(朴坤)장군이 무예와 학문을 닦던 곳이다. 그는 밀성 박씨 태사공파(太師公派) 박언부(朴彦孚)의 11대손으로 연상리로 이주해온 박의번(朴義番)의 둘째 아들로 고려 공양왕 3년(1391년)에 태어났다.
 박곤은 무과에 응시하여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를 두루 거쳐 21세에 장원급제하였고 세종 1년(1419년) 최윤덕(崔潤德) 장군의 막하(幕下)로서 대마도 정벌 및 남해 왜구를 토벌 하였고, 34세인 세종 11년(1429년) 순문사(巡問使)로 북방의 성(城)들을 살피고 국방정책의 입안에 참여 하였다. 그 후 공조(工曹), 호조(戶曹), 예조참판(禮曹參判) 및 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을 거쳤고,특히 축성(築城)을 맡거나 진지(陣地)를 심사하고 국방의 자문에 치중 하였다. 세종 18년(1436년) 명(明)나라 영종(英宗) 즉위시 하례사(賀禮使)로 갔다가 황제가 그의 사람됨을 보고 벼슬을 내렸을 때 거절하였는데, 대신 미인 3인을 얻어 그곳에서 일걸(一傑), 이걸(二傑), 삼걸(三傑)의 세아들을 낳았고, 이들은 표(瓢)씨의 성을 얻어 중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귀국후 다시 한성판윤을 지냈으며, 40대 중반에서부터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연못앞에 어변당을 짓고 여기에서 여생을 마쳤다. 어변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서 별당채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박곤이 중국에서 돌아온 1440년경에 건축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1841년에 다시 중수하였는데 이호윤(李顥潤)이 쓴 그때의 중수기(重修記)를 편액(扁額)에 기록하고 있다. 배치는 앞에 방지(方池)를 두고 그 폭에 맞추어 3칸의 어변당이 서향(西向)하여 있고, 그 앞에 박곤이 심었다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역사를 말해주며 서 있다.
평면은 2칸 대청과 온돌방 1칸을 두었는데 대청의 남쪽을 개방하여 측면 진입을 만들었고, 전후로는 툇마루를 두었는데 앞에만 계자각난간(鷄子脚欄干)을 하였다.
 기둥은 전부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민도리의 3량(樑) 맞배 구조에 연등 천장을 하고 있다. 현재는 주위의 영역이 정화되어 중앙에 충효사(忠孝祠)가 들어서 있으며 그 오른쪽에 유물관(遺物館)이 있고 왼쪽에 어변당(魚變堂)이 있는 배치 형태이다.

 

 적룡지(赤龍池)는 조선초기 장수로서 공조(工曹), 호조(戶曹), 예조판서(禮曹判書) 및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박곤(朴坤)장군이 무예를 닦던 어변당(魚變堂)앞에 있는 연못이다.
 박곤이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하여 뜰에 연못을 파고 조석(朝夕)으로 물고기에게 밥을 넣어주며 지성으로 길러서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였는데, 어느날 이에 감읍(感泣)한 물고기 한 마리가 붉은 비늘(赤鱗)을 남기고 용(龍)이 되어 승천하는 이변(異變)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들은 그 때부터 이 연못을 "적룡지(赤龍池)"라 부르고, 건물을 어변당(魚變堂)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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