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 죽바위-대산사
각남면 녹명리(鹿鳴里)의 옛이름은 구만동(救萬洞)이라 하였다. 당시의 구만동은 지금의 신당동(新堂洞), 녹명 1동, 2동(鹿鳴 1洞, 2洞)이 합쳐서 한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한다. 어느해 큰 홍수가 일어나서 밀어닥친 급류가 세갈래로 갈라지면서 큰 내가 되어 마을이 지금처럼 세 동네로 갈라졌다고 한다.그때까지 이 동네를 구만동이라 부르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조 제 14대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길을 나누어 창녕, 영산, 밀양을 거쳐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쳐들어 왔다.구만동 앞에 있는 운정산(雲亭山)은 사방이 한 눈에 보이는 요지였다. 왜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동민과 이웃마을 주민들은 이 산 속에 숨어서 성을 쌓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싸울 준비를 갖춘 후 왜적을 기다렸다.다행히 왜적은 이 곳에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쳐 북상하였다. 그곳에 숨어 있던 1만여 명이 목숨을 건졌다 하여 그 후부터 이 곳을 구만동이라 하였다 한다. 당시 성을 쌓기 위하여 날랐던 돌들이 지금도 산 밑 들판에 군데군데 흩어져 있고, 성지(城址)도 약간 남아 있다.
이 옛 성터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높이 20m 가량 되는 바위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이 바위의 옛 이름은 죽바위(粥岩)인데 이는 죽을 넓은 그릇에 담아둬야 편하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죽바위(粥岩)로 불렀다.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 어떤 이승(異僧) 한 사람이 이 곳을 지나다가 바위를 보고 나무꾼에게 물었다. "이 바위가 잘 생겼는데 이름이 무엇이요?"하니 죽(粥)바위라 부른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이승(異僧)이 "이 곳은 장사(壯士)가 태어날 고장인데 장수가 어찌 죽을 먹고 힘을 쓰겠느냐"하며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대나무 한 그루를 구해와서 심어놓고 "앞으로는 죽암(竹岩)이라 부르시오"하고는 길을 떠났다.그로부터 이 바위를 죽암(竹岩)이라 부르게 되었고, 대나무는 수백 그루로 늘어갔다. 세상이 평온해지자 죽바위를 중심으로 하는 운정산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사슴이 마을 뒷산까지 내려와서 울게 되자 구만동을 녹명동(鹿鳴洞)으로 바꿔 불렀다 한다.(자료; 청도군청 문화관광)
답사일시: 2013.4.27(토)
각남면 면사무소 사무실입구에 걸려있는 죽바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