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람/경남권

창녕 관룡사와 용선대

그리운 바람길 2010. 11. 1. 16:56

 관룡사는 신라시대 8대 사찰중에 하나였으며, 원효대사가 제자 1,000 여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화한 도량이었으며, 국가에서 지정한 4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관룡사 창건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신라 진평왕 5년(583년)에 증법국사가 초창하였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200 여년 전에 신라 흘해왕 40년(349년)에 약사전이 건립되었다는 설이 있으니 어느 경우에라도 최소한 지금으로부터 1,500 여년 전에 건립된 고찰임에는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관룡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원효대사께서 제자 송파와 함께 칠성 100일 기도를 마친날, 화왕산 정상 월영삼지에서 아홉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광경을 보았다고 하여 볼 관(觀), 용용(龍)자를 써서 관룡사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그 뒤산을 구룡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본 사찰은 임진왜란 당시 왜구의 방화로 전체 사찰이 소실되었으나 오직 약사전만은 화재를 피했으며, 특히 용선대 석조 석가여래좌상은 한가지 소원을 반드시 들어준다고 하여 소원성취 기도처로, 약사여래불 부처는 질병을 낫게 해준다고 하여 질병극복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답사일시: 2010년 10월 17일(일)

답사코스: 창녕 망우정-관룡사-용선대-옥천사지

 관룡사 입구에 좌우 마주보게 2주가 서 있는데, 일명 돌장승, 벅수라고도 하며 민속적인 어떤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이곳으로부터 관룡사의 경내를 표시하는 석표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자연석에 남녀상을 각각 새겼다.

  이 장승은 토지의 경계를 위한 표지이지만, 그 외에도 사찰 토지안에서의 사냥과 어로를 금지하는 호법, 잡귀가 출입하는 것을 막아주는 수호신, 풍수지리학적으로 허한 곳을 보충해주는 비보 등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점에서 이 석장승은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왼쪽에 있는 장승이 남장승이고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이 여장승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장승은 상투와 같은 둥근 머리와 툭 튀어나온 왕방울 눈, 주먹코 등이 투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만 남장승의 턱이 각진데에 비해 여장승의 턱은 부드러운 선을 유지하고 있다

 

 두 장승은 모두 절을 지키는 수호신의 위상에 걸맞게 다문 입술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민간신앙에 맞는 소박함과 친밀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건물은 1965년 해체·보수 공사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 태종 원년에 창건하여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9년에 중창하였고, 그후 영조 25년에 중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관룡사 사적기에는 숙종 30년(1704) 가을의 대홍수로 금당 부도가 유실되고 승려 20여명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후 숙종 38년(1712)에 이 대웅전과 기타 당옥은 재건한 것으로 되어 있어 상량문과는 일치되지 않는 점이 있으나, 건물에 관한 한 상량문을 더 중시해야 옳을 것 같다.
 팔작(八作)지붕의 다포(多包)집계 건물로 비교적 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 내부는 뒤쪽에 치우쳐 고주(高柱)2개를 세워 그 위로 대들보가 건너가게 했다

 

 경남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건물(원음각)은 1634(인조12)에 처음 건립된 사원의 누각건물이다. 건물의 상량문에 의하면 1763년(영조39)에 크게 중건했다고 하는데, 1704년(숙종30) 대홍수때의 산사태로 훼손된 것을 고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불구를 보관하거나 설법장소로 쓰이고 있다.

 

1) 약사전: 신라(新羅)때 창건되었다고하나 정확한 연대(年代)는 미상(未詳)으로 건축수법상(建築手法上) 조선초기(朝鮮初期)로 추정되는 

               소불당(小佛堂)이다. 

2) 삼층석탑: 관룡사 경내에 있는 방형(方形)의 삼층석탑으로,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으나 조각수법과 양식은 신라시대 3층석탑의 형식을 따르

                고 있다. 하지만, 규모가 줄어 들고 각부의 양식 수법이 간략해지고 섬약해진 것을 보아 고려시대 전반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된다

 

 관룡사의 약사전에 안치되어 있으며, 16개 꽃잎이 겹쳐진 부연(附椽)이 아름답게 새겨진 대좌(臺座)위에 앉아 있는 여래좌상이다.
수인(手印)은 약사인(藥師印)인데 오른손의 약호(藥壺)는 없어진 듯하다. 하대석(下臺石)은 제작기법이 수려하여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상대석은 제작기법이 거칠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관룡사 서쪽의 봉우리인 용선대 마루에 동향(東向)하여 앉힌 여래좌상으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똑같은 양식으로 조성된 불상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좌상(坐像)은,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높고 큼직하며 얼굴은 4각형에 가까우나 풍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