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탐방 (6)부소산성(낙화암)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북동쪽의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산성을 동반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迎日樓), 반월루(半月樓), 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 사방의 문지(門址),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 도성의 일환이며,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의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 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대대적인 개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부의 성벽은 통일 신라 시기에 수축되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고을의 규모에 맞도록 축소되어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자료: 부여군청 문화관광)(자료: 부여군청 문화관광)
방문일시: 2014.8.15(금)
사자루는 부소산 서쪽 봉우리 정상, 곧 달을 보내서 ‘송월대(送月臺)’라 불리는 봉우리에 있다. 이곳은 해발 106m로 부소산에서는 가장 높아서 동으로는 계룡산, 서로는 구룡평야, 남으로는 성흥산성, 북으로 울성산성과 증산성 등이 보여 전망이 아주 좋다. 아마 백제 시대에는 망루가 있어서 부소산성의 서쪽 장대 구실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자루는 1919년 당시 부여군수인 김창수가 주도하여 임천 문루인 배산루(背山樓)를 옮겨 지었고, 1990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땅을 고르다가 금동불(일명 정지원명 금동불)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사자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의 건물로 1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웠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익공 계열로 익공과 익공 사이에 화반 대공을 설치하였다.
사자루 편액은 기미년(1919) 5월에 고종의 아들인 의왕(義王) 이강(李堈)공이 썼고, ‘백마장강(白馬長江)’ 편액은 조선 말기 명필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썼다.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扶蘇山城)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평면을 6각형으로 지은 정자(亭子)이다. 정자의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뛰우고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평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꽃 문양(紋樣)을 그려 놓았다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부소산 북쪽기슭의 백마강 좌안(左岸)에 자리한 고란사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법당과 요사(窯舍)의 건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사찰이다. 이 사찰은 불적(佛跡)보다는 고란초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법당 뒤편에서 나오는 약수와 함께 이 사찰의 명물을 이루고 있다. 고란사는 백제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저하나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고, 현재의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건물(寺刹建物)은 은산(恩山) 승각사(乘角寺)를 이건(移建)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 ?∼656), 흥수((興首), ?∼?), 계백((階伯), ?∼660)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祠堂)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 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다. 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